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나카 기누요 (문단 편집) == 상세 == 1924년 14살의 나이로 [[쇼치쿠]] 영화사의 아역배우로 데뷔한다. 기누요의 가족은 [[시모노세키]]의 대지주로 기누요가 태어났을 땐 매우 부유했지만 기누요가 채 5살이 되기도 전 아버지가 사망하고 가세가 빠르게 기울기 시작하면서 가난으로 가족들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기누요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본전통악기인 [[비와]]를 배우면서 비와전문 가극단활동을 시작하는 등 음악적 재능도 보였다. 당시 어머니는 기누요를 비와소녀가극단에 입단시키면서 출세를 지원했으나 가극단이 당시 경기침체와 더불어 일본전통음악의 쇠퇴와 맞물려 해산을 당하자 결국 기누요의 뜻대로 영화계 활동을 허락한다. 당시 극단활동을 통해 어느정도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 본 [[쇼치쿠]] 관계자와 쇼치쿠에서 당시 직원으로 근무하던 기누요의 오빠의 주선으로 오디션을 보고 1924년 정식으로 쇼치쿠 전속 배우로 데뷔한다. 데뷔작은 1924년 노무라 호테이 감독의 “겐로쿠의 여자”다. 데뷔와 동시에 다나카 기누요는 1925년부터 다수의 조역역할을 맡아 맹활약했다. 그러다 시미즈 히로시 감독에게 발탁, 시미즈 감독의 작품에 매번 역할을 맡게 되며 점점 인지도를 넓혀간다. 1928년에만 16편의 [[쇼치쿠]] 작품에 준조연으로 출연하며 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마침내 1929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대학은 나왔지만(大學は出たけれど, 1929)”작품에 주연으로 캐스팅됨으로서 쇼치쿠 간부급 주연배우로 승격된다.[* 이 작품은 [[오즈 야스지로]]의 알려진 현재 필름이 일부라도 남아있는 영화 중에서 쇼치쿠에게 큰 의미인데, 이 영화 이후로 “드라마는 쇼치쿠”, “희극,특수촬영의 [[도호]]영화사”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쇼치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 시기가 된다.] 오즈 감독의 이 작품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다나카 기누요는 1920년대를 마무리하는 일본 무성 영화 시대에 쇼치쿠의 간판 스타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어린시절 가난과 빈곤, 학창시절의 설움을 모두 뒤로한채 일본 최대 영화사의 간판 여배우가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